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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로마 도시 폼페이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묻혔다.
도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거대한 화산재 층 아래 사라졌고,
이곳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도 삶의 마지막 순간 그대로 유적이 되었다.

수세기 후, 고고학자들은 폼페이에서 보존된 인간의 흔적을 발견했다.
특히, 화산재 속에서 신체가 남긴 빈 공간을 석고로 채워 인간 형태의 주조물을 만들어 내면서
폼페이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이 석고상들을 분석하며 다양한 가설을 세웠다.
어떤 것은 가족의 형태로 보였고, 어떤 것은 연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유전자 연구가 진행되면서,
오랫동안 믿어졌던 이야기들 중 일부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폼페이 석고상들의 진실: 유전자가 밝힌 반전
폼페이 유해에 대한 최초의 DNA 분석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그 전까지는 주로 물리적 특징과 고고학적 해석에 의존하여 사망자들의 관계를 추론했다.

그러나 최신 유전자 분석 결과,
기존에 믿어졌던 많은 이야기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 가족으로 여겨졌던 유해, 사실은 생면부지
과거 연구자들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두 명의 성인을 보고
이들이 부모와 자녀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유전자 분석 결과,
이들은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남성과 소년으로 밝혀졌다.

즉, 같은 공간에서 함께 죽음을 맞이했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족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함께 생활했던 노예, 하인, 친구 또는 고용인이었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 입양 문화가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비록 혈연적으로는 무관하더라도 사실상 가족처럼 지냈을 가능성도 있다.

2. 연인으로 추정되던 두 사람, 사실은 남성
폼페이 유적에서 가장 유명한 석고상 중 하나는 "두 소녀"로 불렸다.
이들은 마지막 순간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며,
오랫동안 가까운 자매이거나 어머니와 딸일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유전자 검사 결과,
이들 중 한 명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었다.

즉, 우리가 보기에 여성처럼 보였던 인물 중 한 명이 사실은 남성이었으며, 두 사람은 모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떤 관계였을까?
연인이었을 수도 있고, 절친한 친구였을 수도 있으며,
혹은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다가 함께 최후를 맞이한 사이였을 수도 있다.

이 연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역사적 해석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폼페이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 DNA가 밝혀낸 새로운 사실
DNA 분석을 통해 밝혀진 것은 관계의 재구성뿐만이 아니다.
폼페이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유전적 배경을 가졌는지도 처음으로 분석되었다.

1. 폼페이는 다문화 도시였다
폼페이는 로마 제국의 일부였지만,
당시 무역, 정복, 이주 등으로 인해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았다.

DNA 분석 결과,
폼페이에서 발견된 사람들 중 일부는 지중해 동부, 즉 그리스와 레반트(현재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지역에서 유래한 유전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폼페이가 단순한 로마 도시가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다문화 도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로마 시대의 노예제와 이주민의 흔적
로마 시대에는 노예제가 일반적이었다.
많은 노예들은 정복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오거나, 상업적 거래를 통해 유입되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유전자 분석 결과,
일부 사람들은 로마 본토 출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이주민 또는 노예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폼페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던 곳이었다.

기존 연구와의 차이점 – 시각적 해석의 위험성
이 연구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과거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1. 시각적 해석의 오류
폼페이의 석고상들은 19세기부터 만들어졌고,
당시 연구자들은 순전히 신체적 특징과 자세만을 보고 그들의 관계를 추정했다.

그러나 유전적 분석이 진행된 후 밝혀진 사실은,
이러한 해석이 얼마나 쉽게 틀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2. 과거를 바라보는 편견의 문제
우리는 과거를 볼 때,
현재의 사회적 가치관과 감정을 투영하는 경향이 있다.

폼페이 유해가 발견된 초기,
많은 연구자들은 핵가족 중심의 해석을 적용했다.
즉, 함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부모-자녀, 자매, 부부 관계일 것이라고 가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 시대에는 가족 구성의 개념이 현대와 달랐고,
입양, 노예, 하인, 후견인 제도 등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이번 연구는 우리가 단순한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유전학이 역사 연구에 미치는 영향
폼페이 유해의 유전자 분석은 단순한 고고학 연구를 넘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겉모습만으로 관계를 추측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다.
로마 시대 폼페이는 다문화 사회였으며, 다양한 인종과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했다.
핵가족 중심의 해석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해석할 때, 현대적 편견이 개입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이번 연구는 유전학이 역사 연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폼페이의 이야기들이 다시 쓰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과연 다음 연구에서는 어떤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질까?
과학과 역사가 만나 새로운 발견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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